This is just to say

I have eaten
the plums
that were in
the icebox

and which
you were probably
saving
for breakfast

Forgive me
they were delicious
so sweet
and so cold

by kaya | 2009/04/01 23:28 | 트랙백 | 덧글(0)

[영화리뷰]필름2.0 - 화양연화

사랑의 초심에 뿌리를 둔 미래의 영화 <화양연화> 필름 2.0 2000-10-19 14:52:00
<화양연화>의 시작 타이틀과 엔딩 타이틀은 붉은 바탕에 큰 흰 글씨로 열고 닫는다. 이것은 <해피 투게더>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전에는 흰 바탕에 검은 글씨였다. 중국집 간판같은 그 타이틀은 그의 강렬한 변화를 예고하는 것임과 동시에 자기 문화에 대한 자긍을 말한다.

이 영화의 핵심 이미지는 '조금 느린 움직임'과 냇킹콜의 '음악'이다. 그 느낌, 얼핏 스쳐 지나가는 느낌들의 포착, 바로 그것이다. 복잡한 거리 3미터 앞에서 불현듯 마주친 독특한 감정을 지닌 듯한 이성과 아주 짧게 눈이 마주친 후 닿을락 말락 어깨를 스치며 지나칠 때의 느낌, 그 느낌으로 <화양연화>를 봐야 한다. 그런데 만약 그 느낌이란 것이 다시 만질 수 있는 것이라면, 만약 상대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알아채 버린다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격앙으로 우리는 까무러쳐 버릴 것이다. 감독 왕가위는 '아름다운 불륜의 감정'을 찰나의 이미지에 담아 우리를 자유로운 감정의 숲으로 인도한다. 그 숲 속에는 왕가위의 정밀한 설계도가 있었고, 또 그 설계도 아래에는 너무 많이 알아 버린 영화적 지식으로부터 튀어나온 영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1962년 홍콩. 여행사 직원 첸(장만옥)과 신문사 편집장 차우(양조위)는 이웃한 두 집으로 같은 날 이사를 온다. 왕가위 영화가 늘 그렇듯이, 우연이 영화의 출발이 되는 셈이다. 여느 영화와 마찬가지로 상투적인 설정이긴 하지만 우연을 정말 운명적인 것으로 느끼게끔 할 수 있기 때문에 왕가위는 다른 감독과 갈라설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섬세하게 감정을 꿰뚫는 이미지의 예리한 포착, 그것들을 차곡차곡 쌓기, 그리고 그 위에다 음악을 덧칠하는 것. 물론 그것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그는 그것을 다시 해체하여 서사를 다시 재구성한 후 이야기와 감정의 리듬을 잡는다.

첫 만남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감정 없는 만남이다. 일상적인 분주함, 곁에 있지만 실제로는 부재하는 결혼한 상대와 같이 사는 모습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퇴근하는 차우와 혼자 먹을 국수를 사기 위해 내려가는 첸은 가파른 골목 계단에서 수없이 어깨를 스치며 마주친다. 숨이 멎을 듯한 이미지들의 넘쳐남! 두 번째 시퀀스. 둘은 각자의 남편과 아내가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애인 사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둘은 같이 식사를 하지만 "절대 잘못돼선 안돼요."라고 다짐한다. 둘은 이해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그 순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담배 연기와 그만큼 가장 쓸쓸한 뒷모습을 보게 된다.

세 번째 시퀀스. 이제 배신당한 두 남녀 사이로 행복한 시간이 스며든다. 네 번째 시퀀스. 배신한 상대와 헤어지기 위한 연습을 하고, 또 둘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진동한다. 자신들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봤자 불륜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다섯 번째. 싱가폴에 사는 차우를 찾아온 첸은 전화가 연결되자 전화를 끊는다. 여섯 번째. 1966년 홍콩. 첸은 옛 집을 통채로 전세내고 얼마 후 차우가 이전에 살던 옆집을 찾아온다. 하지만 둘은 만나지 못하고 스쳐간다. '이제 거기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면서. 1967년 캄보디아. 차우는 크메르 왕국의 비밀을 담은 앙코르와트 석조 건물 구멍에 마음 속의 비밀을 불어넣고 진흙으로 봉한다. 하지만 그 흙에도 풀은 난다. 끝이다. 끝나 버린 것이다. 하지만 과연 사랑은 그렇게 끝날 수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멜로 드라마들은 그 결말을 연기하는 지연 전술에 의존한다. 하지만 <화양연화>는 반복과 시간의 건너뜀이라는 독특함을 선택한다. 첸과 차우의 부딪힘 또는 만남은 사건의 별다른 동기가 되지 않으면서도 계속 반복되고, 스토리가 취하고 있는 시간은 어떤 때는 아주 밀도있게 구성되지만, 대부분은 띄엄띄엄 건너뛴다. 하지만 이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꼴이다. 차우의 작업실인 호텔 2046호에 처음으로 들어설 때의 첸의 모습과 그 미장센, 가장 설레는 심정이면서도 그만큼 무료하게 보이는 첸의 이미지 등이 그 반복과 시간의 건너뜀을 메우는 동시에 서사의 감정을 정당하게 강화시킨다.

왕가위는, 논리적 개연성을 뛰어넘은 이미지들의 결합만으로도 무협의 정신 세계와 애절한 사랑을 극대화시킨 <동사서독>의 그것보다는 친절하고 구체적으로 이미지의 노래를 부른 것이다. 예컨대, 첸과 차우는 헤어지는 연습을 한다. 카메라는 약간 대각선으로 이동하고, 프레임은 느려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카메라는 멈추고 동시에 첸은 자신의 팔로 다른 팔을 감싼다. 물론 이것은 순진한 불륜 남녀의 헤어지는 연습 장면이다. 하지만 그 잔인하지만 가공된 시간은 실제로 살아나고, 스크린 바깥으로 튀어나온다. 그렇게 왕가위는 다시 <아비정전>으로 돌아가서 <해피 투게더>까지 비행한 것이다.

하지만 영화만으로 모든 것을 다 보았다고 할 수는 없다. <화양연화>의 시작 타이틀과 엔딩 타이틀은 붉은 바탕에 큰 흰 글씨로 열고 닫는다. 이것은 <해피 투게더>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전에는 흰 바탕에 검은 글씨였다. 중국집 간판같은 그 타이틀은 그의 강렬한 변화를 예고하는 것임과 동시에 자기 문화에 대한 자긍을 말한다. 부언하자면, 그는 과거 또는 사랑의 초심에 뿌리를 두고 현재를 넘어선 미래의 영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이 영화에 들어있는 퇴행적 정서와 그 특유의 방식을 문제삼을 수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심을 유지하면서도 가장 앞선 영화적 방식으로, 그것도 대중 영화라는 제도 속에서, 헤쳐 나가는 <화양연화>는 왕가위의 또다른 대표작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by kaya | 2009/01/01 00:57 | 영화 | 트랙백 | 덧글(0)

[영화리뷰]필름2.0 - 화양연화

왕가위 영화 스타일의 상투적인 반복 필름 2.0 2000-10-19 14:52:00
<화양연화>는 왕가위의 그 어떤 영화들과도 다르지 않고 전작들과의 교집합을 빼버리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재생산일 뿐이다. 다가갈 수 없는 사랑의 침전은 이제 너무 지겹고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감각적인 이미지는 더 이상 우리에게 자극을 주지 못한다.



왕가위 영화의 인물들은 언제나 자기만의 고립된 영역에 갇혀 있었지만 <화양연화>는 도가 지나쳤다. 이번 영화에서 왕가위는 자신이 창조했던 그 어떤 캐릭터보다도 심하게 자기 세계에 갇혀 버렸다. <화양연화>의 모든 요소는 전작들의 상투적인 반복이거나, 혹은 전작들의 핵심적인 부분이 제거된 하향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왕가위는 자기 이미지의 함정에 빠졌고 자기 영화의 감상주의에 관객들보다 먼저 취해 버렸다. 그는 이제 정말 '변해야 한다'.

나른한 고요가 흐르는 도시의 밤거리, 겉으론 내비칠 수 없는 속마음으로 폭발할 것만 같은 인물들, 패배주의에 젖은 무심한 표정, 클로즈업과 슬로우 모션으로 휘감기는 카메라, 현실적인 시간감각을 무너뜨리는 변형된 이미지, 이미지와 사운드의 폭발적인 결합. 왕가위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이 스타일은 <화양연화>에서 고스란히 재생된다. 장만옥과 양조위가 걸어가는 축축한 홍콩의 뒷골목은 <아비정전>에서 유덕화와 장만옥이 대화를 나누던 밤거리와 일치하며 둘이 스치듯 지나치는 시장 어귀의 계단은 <중경삼림>에서 임청하와 금성무가 비껴가던 시장터와 겹친다. 어색하게 함께 앉은 아파트의 침실은 <아비정전>에서 유덕화와 장국영이 재회한 여관방과 오버랩 되고 몇 번 등장하는 택시 쇼트는 <해피 투게더>와 앵글까지 일치한다. <화양연화>의 모든 형식과 정서는 전작들의 총 정리 버전이다.

자기 스타일을 유지하는 게 뭐 어떠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작가에게 전작의 고루한 답습은 치명적이다. 그 동안의 왕가위는 조금씩 달랐고 늘 새로웠다. 작가적인 일관성을 이루는 기본 질료는 동일했지만 <아비정전>과 <중경삼림>은 분명히 다른 영화이고 <동사서독>과 <해피 투게더>는 변형의 수위가 상당히 높다. 심지어 <중경삼림>과 <타락천사>조차도 성공적이진 않았지만 서로 변별시키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화양연화>는 왕가위의 그 어떤 영화들과도 다르지 않고 전작들과의 교집합을 빼버리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재생산일 뿐이다. 다가갈 수 없는 사랑의 침전은 이제 너무 지겹고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감각적인 이미지는 더 이상 우리에게 자극을 주지 못한다. 장만옥과 양조위가 조우하는 계단 쇼트의 이미지-사운드 조합은 그의 모든 영화들 속에서, 심지어는 <화양연화> 내부에서조차 심하게 똑같은 모습으로 여러 번 반복된다. 이젠 좀 지겨운 것이다. 왕가위는 형식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모더니스트지만 변주하지 못한 형식은 아무런 정서도 전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 영화에서 그간의 왕가위 영화들에서 공급받던 감정의 폭발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화양연화>의 진짜 오류는 자기 스타일의 답습보다는 훨씬 더 심각한 데에 있다. 왕가위는 이 영화에서 그 동안 자기 영화를 매력적으로 포장했던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을 도외시하고 그 요소들이 만들어낸 껍데기만을 반복하는 이상한 태도를 보여준다. 왕가위 스타일의 심층에 자리잡은 핵심은 크게 세 가지다. '이미지로 양식화한 사랑의 흔적', '사적인 기억의 확장', 그리고 '뒤틀린 시간'이다. 왕가위가 묘사하는 사랑은 언제나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로 변조되고 가공된 사랑의 흔적들, 그리고 사랑의 감상적인 잔여물이다. 그것은 현대적이고 도시적이며 따라서 우리 시대의 사랑을 지적하는 최적의 수단이다. 그러나 <화양연화>에서 왕가위는 장만옥과 양조위에게 서로 사랑하는 것 이외의 감정을 불어넣지 못했다. 예컨대 <중경삼림>에서 물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양조위와 그의 아파트에 침투해 자기 공간으로 만들어버리는 왕정문처럼 그들 각자 사랑의 상념 때문에 행위하는 이미지들을 탐색하지 않은 채 사랑 그 자체에 직접 다가가려 한다. 이 분야에서 왕가위는 서툴다. 그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라 사랑의 표상을 수집하는 고고학자이다. <화양연화>에서 그는 자기 영역이 아닌 곳에 섣불리 뛰어든 셈이다.

왕가위 영화의 주인공들은 타인이 감지하기 힘든 골 깊은 기억과 사적인 과거의 사건들로 상심하는 인물들이다. 기억과 과거는 표면적인 현재보다 훨씬 더 커다랗게 확장되면서 그들의 모든 생활을 지배한다. 이것이야말로 개인들의 사사로운 심리적인 역사에 집중하고 그것이 현재적인 삶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가장 왕가위다운 테마다. 그러나, <화양연화>의 두 주인공에겐 이런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교류를 막고 선 것은 결혼과 불륜이라는 제도적인 장벽이며 이것은 전작의 인물들이 소유하고 있던 깊고 풍성한 개인 영역에 비하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초라하고 피상적이다. 이 때문에 장만옥과 양조위는 안쓰러울 정도로 평면적이고 그들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왕가위는 인물들의 사적인 기억과 상념이 세계의 구성 원리인양 확장시켜왔다. 그들의 사사로운 감정은 마치 세계를 침몰시킬 듯한 비애감에 젖는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방법은 바로 시간을 뒤트는 것이다. <동사서독>에서 무한한 시간의 역행과 퇴적된 기억은 현재를 지배하고 <중경삼림>의 많은 쇼트들은 순간적으로 시간을 늘이거나 압축함으로써 인물들에게 현실적 공간 대신 심리적 공간을 마련해 준다. 언제나 그들은 현실을 살아가기 보다 몽상적인 자기 세계에 즐겨 머문다. 그것은 바로 시간의 왜곡된 양식 때문이었지만 <화양연화>에서 왕가위는 자기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이었던 이 시간의 힘을 외면해 버렸다. 두 사람의 사랑은 현실의 한복판에서 직접적으로 이루어지고 그들에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아픔을 상쇄할 개인적인 영역이 마련되지 않으며 뒤틀린 시간이 부여하는 몽환의 확장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화양연화>는 너무나 순진하고 노골적이며 단순한, 게다가 아무런 감흥도 전해주지 못하는 사랑 이야기에 그쳐 버렸다. 자기 영화의 외형 속에서 발을 헛 딛고 정작 핵심은 지나쳐 버린 왕가위의 신작 <화양연화>는 이제 정말 그가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할 때가 되었음을 말해주는 영화다. 그는 시대를 앞선 스타일리스트이고 언제나 외롭게 선두를 지키는 전위의 감독이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는 그에게 새롭고 신선한 무언가를 바란다. 이것은 최고의 관객들이 바라는 당연한 요구인 동시에 최고의 감독이 짊어져야 할 자발적인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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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a | 2009/01/01 00:54 | 영화 | 트랙백 | 덧글(0)

[영화리뷰]씨네21 - 벼랑 위의 포뇨

“소년과 소녀, 사랑과 책임, 바다와 생명 이러한 자연의 것들을 서슴없이 그려내어 이 시대의 신경증과 불안에 맞서나가고자 한다.”-미야자키 하야오


(줄거리부분 생략하고 이어서)
바다가 중요했으니 바다의 묘사가 중요했고 물결의 무늬가 중요했다. “이번 영화는 특히 파도가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말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11만장의 셀을 사용했다면 <벼랑 위의 포뇨>는 17만장이라는 셀화를 일일이 수작업으로 그려냈다고 강조한다. “바다가 단지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갖던 그에게 그럴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바다를 하나의 생명으로 생각하여 아이들이 보는 바다의 느낌, 어른들이 보는 바다의 느낌 등 여러 가지를 살려내고자 했다.”

여기서 바다는 정말 가지각색 총천연색 무지개이며 자주 성을 내거나 웃는 다종다양한 성격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포뇨가 소스케를 찾아올 때 바다는 수많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오는 것처럼 보인다. 바다의 여신이 등장할 때에는 온통 눈부신 금빛이다. 그리고 세상이 바다가 됐을 때 여기서 그 풍경이란 실은 재앙이 아니라 생명수로 넘쳐나는 낙원이다. 고생대에 살던 동물과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생명체가 함께 어울리는 중간계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여기서 대립없는 생명력의 부활을 말하고 싶어한다. 자연의 생명. 그래서 그 생명의 원천이 되는 물을 넘치게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불구가 되어버린 오늘날 세상의 환경에 대해 좀더 심각하게 비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모험의 장으로서 물세상이 오고 그들이 거기서 헤어지지 않으면서 웃고 있을 때 더 큰 희망극이 성사되리라 본 것이다. 그러니 이 대책없는 희망이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비판해도 할 수 없다. 그러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째서 당신의 동심은 그렇게나 현실에 얽매여 있냐며 도리어 호통칠 것이다. 이 영화는 <스틸 라이프>가 아니다. ‘우리 마을이 물에 잠기면 스티로폼을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노저으면서 돌아다닐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했던 당신의 숨기고 싶었던 무책임한 다섯살 동심을 생각해보면 된다. <벼랑 위의 포뇨>에서 세상을 채운 건 그래서 실은 물이 아니라 비유로서의 동심이며 꿈이다.

바다와 육지로 격리되던 두 세계가 결국 완전한 하나의 꿈의 세계가 되어 온갖 생명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결국 <벼랑 위의 포뇨>의 이야기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렇게 말한다. “다섯살 아이가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다섯살 아이는 인간과 신의 중간단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또래의 아이들은 쉰살 어른이 되어도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알고 있기도 하는 그런 존재다.” 그러니 이 대책없는 낭만주의를 귀여워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다섯살을 지나왔고 당신의 아이가 지금 다섯살이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 모두를 다섯살 아이의 시각으로 잠시 돌려놓기 때문이다. 그게 올 겨울 우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용 양말 속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담아주고 가는 선물의 진실이다.

포뇨는 장난감 금붕어의 촉감?



일본 고전부터 바그너의 오페라까지 모티브와 작명의 참조물들

단순하고 선명한 영화지만 <벼랑 위의 포뇨>의 갖가지 모티브와 작명에는 몇 가지 참조물이 있다.

일단 모티브에서 <인어공주>뿐 아니라 “한 어부가 해안으로 떠내려온 거북이를 따라가면서 생기는 이야기인 일본 고전 <우라시마타루>에도 기대었다”고 프로듀서 스즈키 도시오는 넌지시 밝힌다. 소스케라는 주인공 소년의 이름은 일본 근대문학의 대표 격인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문>에 등장하는 소년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그 소년이 벼랑 위에 산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마친 뒤 나쓰메 소세키의 전집을 읽으며 푹 빠져 살았고 소년의 이름을 이번 영화에 넣은 것이다. 그리고 포뇨라는 이름은 욕실용 어린이 장난감 금붕어를 생각해낸 뒤 그걸 만질 때의 촉감으로 떠올린 이름이다. 포뇨는 “고무공을 만질 때의 탱탱한 느낌을 표현하는 감탄사”라고. 그래서 영화에서 포뇨의 실제 이름은 따로 있는데 ‘브룬히루데’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말처럼 “뭐 영화에는 딱 한번 나올 뿐”이지만 이 이름은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2장 ‘발키리’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이름 중 하나다. <벼랑 위의 포뇨>를 만들면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바그너의 음악을 많이 들었고, 그때마다 “이 음악은 아드레날린이 넘치게 한다”고 말했다 한다. 유심히 들어보면 영화음악가 히사이시 조가 만든 <벼랑 위의 포뇨>의 음악은 바그너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특히 파도를 타고 포뇨가 소스케를 찾아 육지로 달려올 때 들리는 그 웅장한 음악이 그렇다.

(글) 정한석 mapping@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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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a | 2008/12/30 13:23 | 영화 | 트랙백 | 덧글(0)

벼랑 위의 포뇨 (崖の上のポニョ: Ponyo On The Cliff, 2008)


벼랑 위의 포뇨(崖の上のポニョ: Ponyo On The Cliff, 2008)
애니메이션,모험,가족/일본/100분/2008.12.17
감독 : 미야자키 하야오
출연 : 나라 유리아(포뇨), 도이 히로키(소스케), 야마구치 토모코

★★★★☆











































귀엽다, 귀엽다, 귀엽다, 귀엽다, 귀엽다!!!!!!!!!!!!!!!!!!!!!! 까와이이이이이!!!!!
포뇨의 생김새부터 목소리, 헤엄치는 모습이며 파도 위를 달려오는 소녀 포뇨 아아...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
정말 그거 하난 최고다. 마치 손이 오그라들고 포뇨를 꽉 쥐고 마구 볼에 부비고 싶은 심정이랄까. -_-;
영화를 보는 내내 친구와 함께 키득거렸다.
원령공주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와 같이 탄탄한 줄거리나 깊은 감동은 없지만
포뇨는 포뇨 나름의 재치와 푸근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 넘실대는 파도와 울렁거리며 헤엄치는 해파리의 모습이란!
아날로그 식의 애니메이션 특유의 맛깔스러움이 베어났다.
영화를 보고 실망한 사람도 많았고 '유치하다'며 혀를 내두른 사람들도 많았지만
나는 그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씩 웃고 있을 감독님과 천진난만 웃고 뛰어다닐 포뇨 모습에 온 몸이 간지러워졌다.
포뇨와 소스케의 웃음소리가 내 몸 속을 가득 차서일까. 단순해도 좋고 유치해도 좋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는 따뜻하고 사랑스럽고 파도로 넘실댔기 때문에 나는 대만족이다.

영화는 자연과 어머니, 그리고 상생, 회귀 등의 imagery로 가득차있었다. 이런 주제는 굳이 재미있지 않아도 마음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준다! 물고기가 파도로, 파도가 포뇨, 그리고 포뇨가 인간으로. 우리는 모두 물에서 태어나지 않았는가?! 이 물(水)로 가득찬 영화는 태고적 분위기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기도 하다.

포뇨 목소리, 나라 유리아.
소스케 목소리, 도이 히로키



그리고 감독님. 나는 그의 영화를 사랑한다. Furthermore! 영화 장르를 넘어 그의 인간관과 철학을 사랑한다. 만수무강하셔요.

마지막으로 포뇨 인형. 아... 갖고 싶어 ㅜㅜ

by kaya | 2008/12/30 13:16 | 영화 | 트랙백 | 덧글(0)

[영화기사]필름2.0 - 아주르와 아스마르

서로 다른 세계의 환상 <아주르와 아스마르> 필름 2.0 2008-02-18 17:33:00
개성적인 작품으로 찬사를 받아온 미셸 오슬로 감독이 4번째 영화 <아주르와 아스마르>를 통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계로 눈을 돌렸다.

너그럽고 인자한 아랍인 유모 제난. 그녀는 검은 눈, 검은 머리를 한 아들 아스마르와 노란 머리, 파란 눈을 가진 성주의 아들 아주르를 형제처럼 기른다. 마법의 열쇠를 구하고 빨간 사자와 무지개 날개를 가진 새를 물리쳐야 당도할 수 있는 요정 진의 궁전. 거기서 진을 구해 진정한 행복을 얻는다는 제난의 노래는 두 소년의 꿈이 된다. 어느 날 엄격한 아주르의 아버지는 그를 시내의 기숙학교로 보내고, 제난과 아스마르 모자를 쫓아낸다. 시간이 흘러 청년이 된 아주르는 여전히 요정 진을 찾으려는 꿈을 꾸고 마침내 바다를 건넌다. 그러나 폭풍우로 배가 난파돼 섬으로 떠밀려온 아주르. 그곳에서는 아주르의 푸른 눈을 불길하다며 피하기만 한다. 결국 장님 행세를 하게 된 아주르는 투덜거리기 좋아하는 유럽인 크라푸의 도움을 얻어 제난과 아스마르와 재회하고, 요정 진을 찾기 위한 모험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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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쿠와 마녀> <프린스 앤 프린세스> <키리쿠, 키리쿠>까지 개성적인 작품으로 찬사를 받아온 미셸 오슬로 감독이 4번째 영화 <아주르와 아스마르>를 통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계로 눈을 돌렸다. 감독 자신이 어린 시절 프랑스령 아프리카 기니에서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키리쿠와 마녀> <키리쿠, 키리쿠>를 만들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 <아주르와 아스마르>는 아프리카를 떠나 프랑스 앙제로 돌아와 자라면서 보고 느낀, 서로 다른 세계의 충돌과 화합을 환상적인 동화로 그려 보인다. <천일야화>나 <알라딘과 요술램프> 같은 이슬람의 고전에서 영감을 얻은 오슬로는 유럽 세계를 파란 눈, 금발 머리의 아주르, 이슬람 세계는 검은 눈, 검은 머리를 가진 아스마르에 비유하며 두 세계가 동일한 뿌리에서 유래된 형제나 마찬가지고, 따라서 대립과 갈등도 우정과 화해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줄거리는 간결하다. 이야기는 <잉글리쉬 페이션트> <콜드 마운틴>으로 유명한 영화음악가 가브리엘 야레가 만든, 요정 진에 대한 아랍인 유모 제난의 허밍으로 시작한다. 장미와 재스민 향기가 가득한 궁전의 아름다운 요정 진. 마법의 열쇠를 찾아 빨간 사자와 무지개 날개를 가진 새를 물리치면 그녀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내용의 노래다. 같은 젖을 먹고 같은 잠자리에 누워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형제처럼 자라난 두 소년은 요정 진에 관한 노래를 들으며 그녀를 구하겠다는 같은 꿈을 꾼다. 헤어짐과 재회를 거쳐 마침내 험난한 여정에 나서고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을 겪으며, 아주르와 아스마르는 다시 한 번 자신들의 우정과 사랑을 확인한다. 결국 제난의 노래는 두 청년을 통해 현실이 되고 해피엔딩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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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오슬로 감독은 익숙한 소재와 구성 속에 특유의 유머와 위트를 녹인다. 투닥거리며 싸우다가도 어려울 땐 금세 같은 편이 되는 아주르와 아스마르의 소년기 묘사나,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는 엄격한 아주르의 아버지, 사람들이 싫어하는 파란 눈을 안경 뒤에 숨기고 “여긴 좋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 푸!”라며 시시콜콜 불평만 일삼는 크라푸 같은 인물 묘사는 생생하다. 특히 아주르의 아버지와 크라푸는 이슬람 문화, 혹은 유색 인종을 배척하는 유럽인들의 속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다른 편에 서 있는 사람들, 단지 오랫동안 교육을 받은 결과로 이유없이 서로를 싫어하게 된 사람들, 가시철망 밑에서만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것이 미셸 오슬로 감독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아주르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감독이 지향하는 바를 분명히 한다. 영화 속 인물과 자신을 빗댄 오슬로는 “나는 당연히 잘생긴 영웅, 마법 같은 파란 눈을 가진 인물이지만, 또한 자신이 사는 나라면서도 그곳에 대해 트집만 잡는 ‘크라푸’기도 하다”라고 말한다.

영화는 총 6년이라는 긴 제작과정 속에서 비로소 완성됐다. 미셸 오슬로 감독은 프랑스와 북아프리카 이슬람 문화권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2주 만에 완성, 이후 등장인물들의 의상과 배경에 필요한 디자인 작업에 착수했다. “약 100명의 주요 인물이 있고, 또한 200명의 보조 캐릭터를 만들어야만 했다”는 오슬로는 주요 인물의 정면과 3/4 옆모습, 옆모습, 3/4 뒷모습, 뒷모습, 그리고 여러 개의 얼굴 표정과 기본적인 자세를 그려내 영화의 골격을 세웠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영화 전반에 등장하는 정교하고 섬세하게 그려진 배경 화면들이다. 모로코와 튀니지, 알제리 등을 방문하고 그 나라의 지정학과 역사학을 연구한 뒤 그 위에 상상력을 덧입혀 완성한 이미지들이 시종일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인물들의 자세와 표정, 배경 스케치로 만들어진 총 1,300여 개의 컷은 대사와 카메라 동작을 통해 미셸 오슬로 감독 최초의 3D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됐다.

송순진 기자


by kaya | 2008/12/30 12:49 | 영화 | 트랙백 | 덧글(0)

[영화기사]씨네21 - 아주르와 아스마르

눈부시게 아름다운 관용의 철학 <아주르와 아스마르> 씨네21 2008-02-21 12:33:00


- 미셸 오슬로가 전하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관용의 철학 -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소년 아주르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소년 아스마르. 빛과 그림자처럼 다른 두 소년은 아주르의 유모이자 아스마르의 엄마인 제난의 손에서 형제처럼 자라난다. 제난은 소년들에게 머나먼 검은 산에 갇힌 아름다운 요정 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모든 것에 경쟁심을 불태우던 두 소년은 서로 먼저 진을 구하겠노라고 다짐한다. 하지만 아들이 유모의 자식과 어울리는 것에 못마땅해하던 아주르의 아버지가 그를 도시의 기숙학교로 떠나보내고 제난과 아스마르를 쫓아내면서 두 소년은 뿔뿔이 흩어진다. 세월이 흘러 청년으로 성장한 아주르는 꿈꾸던 요정 진을 찾아 나서고, 그 여정의 와중에서 아스마르를 만나게 된다.

<아주르와 아스마르>는 <프린스 앤 프린세스> <키리쿠와 마녀> 등 환상과 전설의 세계를 진귀한 수공예품으로 직조해냈던 프랑스 애니메이션의 장인 미셸 오슬로의 작품으로, 그가 최초로 시도한 3D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한장을 펼쳐 읽어주는 듯한 이야기는 전통적인 민담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름답고 용맹한 두 청년과 자애로운 어머니, 구원을 기다리는 요정 등 익숙한 클리셰들이 이야기의 뼈대를 구성하고 있지만 미셸 오슬로는 이에 더해 동서양 문화의 소통, 차이와 다름에 대한 관용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주르의 푸른 눈을 저주받은 것으로 공격하는 아랍인과 “여기는 플루트가 없어!” “여기는 스튜가 없어!”라고 외치며 아랍 문화에 대한 폄하만을 일삼는 백인의 모습이 배척과 불관용을 상징한다면, 경쟁의 레이스를 벗어나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아주르와 아스마르는 다양한 색깔이 공존해 더욱 아름다운 세상을 부드럽게 노래한다. 농도 짙은 교훈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것은 마법과도 같은 시각적 체험이다. 오슬로의 손을 타고 탄생한 3D는 실사에 근접한 품새를 뽐내는 대신 그림책을 도려낸 듯한 특유의 질감에 절묘한 색채의 향연을 더한다. 극도로 세밀하면서도 우아하게 재현된 아라베스크 양식의 건물들, 모자 끝에 꽂힌 깃털 하나에 이르기까지 눈이 부실 정도로 아찔한 색채를 발산하는 캐릭터들은 시각적인 황홀경을 선사한다. 레바논 출신의 프랑스 작곡가로 <베티블루> <잉글리쉬 페이션트> 등의 영화음악을 작업했던 가브리엘 야레의 우아하면서도 애잔한 음악은 눈의 즐거움을 넘어서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기에 충분하다.

(글) 최하나 raintree@cine21.com

저작권자 ⓒ 씨네21.(www.cine21.com)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기사제공 :

by kaya | 2008/12/30 12:47 | 영화 | 트랙백 | 덧글(0)

아주르와 아스마르 (Azur Et Asmar, 2006)


아주르와 아스마르 (Azur Et Asmar, 2006)
애니메이션,가족,모험/2008.02.21/99분/프랑스
감독 : 미셸 오슬로
출연 : 시릴 머레이, 카림 음리바, 히암 압바스, 패트릭 팀싯
★★★★★
























영상미와 음악이 압도적이다.
하지만 더 뛰어난 건 분위기를 주도하는 상상력이었다.
프랑스 제작 영화라고 써있지만 실제로는 프랑스, 스페인, 벨기에, 이탈리아가
합동 제작한 작품이라고 한다. 고전적 유럽의 분위기와 중동 특유의 문화가
어우러져 한국인이 보기에는 굉장히 이국적이었다. 하지만 보편적인 주제로
공감대의 끈은 놓지 않았다.



판타지를 창조하는 건 한 국가의 기저에 깔려있는 문화적 상상력이다.
이러한 문화적 상상력은 그 나라 국민들의 정체성과 개별성 모두를 키워내는
배양분이고, 우리가 대중적으로 접하게 되는 'fantasy'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유치한 동화 정도로 치부되기 쉽지만 실제로 판타지는 신화와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예를 들면 해리포터는 영국의 신화적 상상력의 총집합체이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도 일본의 문화적 상징과 신화를 잘 구현해 낸
산물인 것이다.
아주르와 아스마르에서도 이런 깊고 뚜렷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문화적 향기가
느껴졌다. 그 깊이와 철학, 역사가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을 만나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

어디선가 나지막한 여인의 콧노래가 들릴 것 같은 아련한 느낌.
새벽 공기와 아라비아의 짙은 향료가 섞이는 느낌.
시각적 황홀함이 내 모든 감각을 흔들어 놓았다면 가히 대단한 영화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by kaya | 2008/12/30 12:12 | 트랙백 | 덧글(0)

The Piano



피아노 [The Piano, 1993]
1993.09.25/119분/오스트레일리아
감독 : 제인 캠피온
출연 : 홀리 헌터, 하비 케이텔, 샘 닐, 안나 파킨

★★★★☆






























*spoiler 있어요
스코틀랜드에 살던 벙어리 아이다(Ada)는 뉴질랜드의 섬에 사는 한 남자와
재혼하게 되고 그녀의 딸 폴로라와 함께 뉴질랜드로 떠난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19세기 뉴질랜드가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
당시 원시 밀림과 같은 새로운 환경에서 그녀가 겪는 변화를 다룬다.
 
대화로 소통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표현의 자유를 허락하는 것은
그녀가 아끼는 피아노.
영화 내내 피아노 음악이 끊이지 않고 영화 전체를 걸쳐 반복되는 
'The heart asks pleasure first'는 거세게 부서지는 파도소리와 바람소리와 만나
바다내음을 담고 장면 장면마다 울려 퍼진다.

그녀의 피아노 사랑에 무신경한 새남편이 무겁다는 이유로 두고간 피아노.
진흙을 밟고 몸을 적셔가며 피아노를 찾아 바다를 향하는 두 모녀와
그들을 도와주는 새남편의 친구 베인즈.
그 속에 들어가 있으면 소금기 나고 축축한, 파도소리 가득한 풍경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비를 흠뻑 머금고 있는 구름이 지나가듯 그들의 운명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피아노 치는 그녀의 모습에 반한 베인즈는 그녀를 피아노 레슨을 구실로
자신의 집으로 부르고 그녀가 피아노를 치는 시간 마다 그녀를 갈망하고 유혹한다.
그 집착 또는 도착과도 같은 열정 때문이었을까.
험악하게 생긴 베인스에게 마음과 몸을 주는 그녀의 모습은 나에게는 조금 반전이었다. 그리고 발각. 그리고 복수. 그러나 변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해피 엔딩.

줄거리는 특별하지 않고 베인스에게 그토록 강한 사랑을 느끼기까지의 아이다의
감정의 흐름이 급작스러운 점은 있지만
피아노를 바다 속에 던지고 나서 일어나는 몇 초간의 일은 정말 멋있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생각으로 죽음을 향해 몸뚱아리를 던졌을 때  불현듯 다시 피어나는 의지란!

영화나 책이나 인간에 관련된 모든 것에서 사람의 의지를 읽어낼 때
늘 큰 감동을 느낀다.
그 의지는 단지 한 개인의 결정과 판단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운명 또는 개인을 압도하는 어떤 자연과도 같은 기적 속에서 발현되는 것.
그래서 의지는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더 큰 힘의 작용이 배후에서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은 나를 좀 더 용기있게, 하지만 겸손하게 살라고 격려해준다.
아이다가 살기 위해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그녀 자신도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런 일이 내가 가장 절망적일 때 기적과도 같이 일어난다면
나는 감히 스스로를 강한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두고 두고 여러 번 다시 보고픈 영화. 피아노 음악이 아름다운 영화. 추천합니다.

by kaya | 2008/12/29 00:39 | 영화 | 트랙백 | 덧글(0)

씨네21-The Fall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다 팔아버려, 신세계를 위해서라면 씨네21 2008-12-09 08:12:03
- 4년 반 동안 28개국에서 사재까지 털어 촬영한 타셈 싱의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제작기 -


“내가 단지 <더 셀>을 만들었던 감독이라는 이유로 혹평이 쏟아졌다. 제작자인 데이비드 핀처와 스파이크 존즈를 전면에 내세웠으면 달라졌을까.” 타셈 싱의 판타지 대작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이하 <더 폴>)은 찬사만큼이나 무수한 혹평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일말의 관심도 없는 대상에게 끊임없이 애정을 퍼붓는 구애자처럼 싱의 마음은 거센 비난에도 좀체 요동치 않는다. 판권을 구입하기까지 15년, 장소 섭외 17년, 주인공을 찾기까지 7년, 촬영기간 4년 반이 걸렸다. CGI 사용은 배제.

제작비의 상당 부분을 사재를 털어서 만든 <더 폴>은 단순히 영화 한편이 아닌, 그가 자신의 인생을 모두 걸고 고백한 영화에 대한 사랑이다. 생활의 95%를 공항과 비행기 안에서 보내고, 파란 하늘이 배경인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마드리드로 날아가는 것이 예삿일이 돼버린 지난한 세월. 비록 가혹하고 냉담한 대상을 향한 구애지만, 이 사랑을 통과하지 않고 그에게 다음 영화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진심어린 고백에, <더 폴>은 결코 진짜라고 상상하기 힘든 장면을 당신의 눈앞에 고스란히 불러온다. ‘반드시 스크린에서 봐야 할 영화’라는 싱의 전언은 그러니까 0.1%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펩시광고를 만든다면 말이죠….’

캔음료 하나의 CF라 하기에 이건 분명 블록버스터다. 바닷가, 호나우지뉴가 메시에게 패스를 하고 메시가 받은 공은 풀로 뒤덮인 행성으로 떨어지고 파브레가스는 정글에서 그 공을 받고, 베컴이 이들과 함께 피지에 모여 콜라를 마신다. 세계 각국, 사람들의 소원을 고스란히 화면에 옮긴 영상. 눈으로 쫓기에도 바쁜 엄청난 화면이 펼쳐진 건 불과 1분5초 사이다. 입이 딱 벌어지는 로케이션과 캐스팅을 가능하게 한 이는 다름아닌 인도 출신의 할리우드 감독 타셈 싱이다. 여기까지가 전부가 아니다. 광고에서나 가능한 ‘미친 짓’을 그는 겁도 없이 <더 셀>에 이은 두 번째 영화 연출작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이하 <더 폴>)으로 확장한다. 머릿속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거대한 코끼리가 망망대해 바다를 헤엄치고, 나무가 제 스스로 불에 타는 초현실적인 광경이 연출되며, 사막 위의 하얀 천이 붉디붉은 피로 물드는 광경이 펼쳐진다. 지금껏 할리우드의 어떤 감독도 보여주지 않았던, 혹은 시도하지 않았던 충격적인 마법의 영상이 주조된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건 ‘내가 할리우드영화를 만든다면 말이죠…’라는 스크린 버전의 펩시콜라다.

싱이 제작을 결심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23년 전이다. 우연히 본 불가리아 원작영화 <요호호>(YO HO HO)에 매료돼 판권을 구입하는 데 걸린 시간이 15년, 스코틀랜드를 시작으로 파리·인도·캄보디아·볼리비아·나미비아·아르헨티나·중국·터키·남아프리카·이탈리아·체코 등 총 28개국 로케이션을 위한 장소 섭외에만 17년 소비, 딱 맞는 주인공을 찾기까지 7년, 실제 촬영기간 4년 반이 걸렸다. CGI의 사용은 배제. 제작비 6500만달러의 많은 부분을 사재를 털어서 만든 <더 폴>은 싱의 집요함이 낳은 결과물이다. 그 사이 제작비 마련을 위해 자신을 빗대어 ‘예술과 사랑에 빠진 창녀’라고 말하며 CF와 뮤직비디오 촬영을 했고 일에 미친 싱에게 넌더리가 난 여자친구를 떠나보냈으며, 준비해뒀던 결혼자금을 다시 영화에 투자했다. 이 정도라면 “만일 새로운 영상을 찾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멸할 것이다”란 신념 하나로 온 스탭을 ‘죽음’의 촬영현장으로 몰아넣었던 독일 감독 베르너 헤어초크의 미친 집착과 다르지 않다. ‘일생 단 한번의 집착’ 영화를 짝사랑한 감독 싱이 만든 환상적인 세상, 그 문을 열어본다.

소녀에게 들려주는 영웅들의 복수담



<더 폴>은 이야기를 하는 스토리텔러와 그걸 듣는 사람, 둘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가 실제 눈앞에 화면으로 펼쳐지는 마법 같은 영화다. 관객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두 사람이라는 ‘실재’와 그들의 이야기 속에만 존재하는 ‘판타지’의 양극을 스크린에서 모두 경험한다. 영화는 1920년 미국 할리우드의 한 병원을 배경으로 한다. 오렌지 나무에서 떨어져 팔에 깁스를 한 소녀 알렉산드리아(카틴카 언타루)와 무성영화를 촬영하다 다리를 다친 배우 로이(리 페이스)의 만남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무료한 병원생활, 호기심 충만한 소녀를 위해 로이는 자신이 지어낸 한편의 거대한 서사시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악당 ‘오디어스’를 향한 다섯 영웅의 복수다. 오디어스 때문에 쌍둥이 동생을 잃은 마스크 밴디트와 아내를 잃은 인디언, 오디어스의 노예였던 오타 벵가, 오디어스 때문에 나비를 잃은 천재 찰스 다윈, 그리고 오디어스의 추방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폭파 전문가 루이지. 로이를 통해 소녀에게 전달되는 이야기는 한편의 복수활극으로 또 하나의 운명적인 로맨스로, 영웅들의 모험담으로 살을 더해간다.

매일 조금씩, 야금야금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서 소녀는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자신의 의견을 첨가하며 이야기의 비극적인 결말을 막아보려 적극 개입한다. 그러나 이 판타스틱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딸을 잠재우려는 자상한 아빠가 들려주는 머리맡 동화가 아니다. 로이의 목적은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돼 애인을 잃고, 배우생활마저 위기를 느낀 자신을 하루빨리 죽여줄 모르핀을 구하는 일이다. <아라비안나이트>의 공주가 왕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1천 가지의 이야기를 지어냈다면, 로이는 죽기 위해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을 연상시키는 모험담을 매일매일 지어내는 것이다. 이야기의 결말이 알고 싶어 안달이 난 꼬마는 로이의 속임수에 철저하게 이용되는 셈이다.

싱이 원작 <요호호>(1981)를 본 건 단 한번뿐이다. 설정은 가져오지만 원작을 철저히 분석해서 똑같은 영화를 만들고, 다시 평론가들의 비교를 당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가 만들 영화는 이제껏 단 한번도 선보인 적 없는 ‘새로운 세상의 창조’였다. 영화에 나온 장소들이 언젠가는 변할 것이고 또 아무도 완벽하게 복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싱의 마음을 좇았다. 단 한장의 시나리오도, 어떤 구체적인 제작 계획도 없었다. 영화 속 알렉산드리아처럼 잡다한 물건을 넣은 상자 하나가 전부인 감독, 허황된 망상가의 ‘사기’에 돈을 대려는 제작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광고계 사람들은 모두 언젠가는 자신의 돈으로 영화를 만들 거라고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프로듀서인 데이비드 핀처는 나를 두고 ‘그걸 현실화한 유일한 멍청이’라고 했다.”

로이 역 배우를 12주 동안 불구라 속이다



“이건 여섯살 아이가 쓴 시나리오다.” 싱은 자신의 공상이 알렉산드리아 역을 맡은 루마니아 소녀 카틴카 언타루를 통해서 나왔다고 말한다. 싱은 촬영 내내 어린 소녀의 공상을 놓치지 않고 그날그날의 시나리오에 반영했다. 그가 요구했던 배우의 요건은 영화를 본 적 없는, 영화를 모르는 아이였다. 배우생활을 경험해서 공주병에 걸린 아이라면 사절이었다. 장장 7년, 광고 촬영을 할 때마다 스탭들을 시켜 그 지역의 학교를 촬영했고, 마침내 찾은 루마니아 소녀 언타루는 원석 같은 존재였다. 애초 싱은 순수함을 담보하기 위해 영화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4살 이하의 아이를 설정했는데 언타루는 6살이지만 영어를 모르니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언타루를 만나자마자 싱은 그의 제작지원자인 동생에게 연락을 해 “다 팔아버려. 이 아이의 이가 자라기 전에. 4개월 뒤면 이 아이는 다른 사람이 될 거야”라고 전했고 결국 집을 팔아버리기 직전에서야 촬영은 끝났다.

이후의 모든 과정은 언타루를 영화가 아닌 실제상황으로 내몰기 위한 싱의 노력으로 점철되었다. 리얼한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싱은 로이를 연기한 리 페이스를 무려 12주 동안이나 불구로 속였다. LA 병원이 재현된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 촬영 때 싱은 영화의 원래 스탭 대신 다른 스탭과 함께했고 리 페이스가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임에 착안해 그의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바꾸고 그가 뉴욕에서 연극배우였다고 말했다. 카메라맨도 조명담당도 프로덕션디자이너도 몰랐다. 화장실에 데려다주는 딱 한명의 간호사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싱에게 속았다. 촬영 내내 스탭들과 분리된 채 유사장애 체험을 한 페이스는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었고, 사실을 안 스탭들은 자신을 속인 감독에게 울고 화내고 욕하고 촬영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누가 누구를 믿고 안 믿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어린 소녀의 마법이 필요했다. 싱은 스탭들의 불만보다 영화가 중요했다. 특히 그에게 언타루의 자연스런 연기는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아이에게 ‘지금 눈앞에서 개가 죽어가고 있다’라고 설명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촬영은 병실 안의 조명을 모두 빼 창문 밖에 설치하고 테이블 아래 숨어들어가 텐트 같은 걸 치고 거기 구멍을 뚫고 진행됐다. 촬영장에서 스탭들에게 소리내지 못하도록 요구했다. 카메라의 포커스를 잡는 것조차 힘들어 촬영을 망치는 날이 허다했지만, 언타루는 페이스에게 귓속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정도로 영화 속 상황을 진짜로 인식했다. 매일매일 대본없이 상황만 주어지는 현장은 스텝들에게도 수수께끼였고, 누군가에게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라고 들은 언타루는 촬영 내내 자신이 찍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영화의 첫날이 촬영의 첫날, 둘쨋날이 촬영의 둘쨋날이었다. 언타루는 리를 알아갈수록 영어를 잘하게 될수록 그와 사랑에 빠졌고, 새로운 이가 자라났다. 전문배우가 아닌 연기자가 한 연기 중 가장 훌륭한 진짜 연기와 함께.

언론의 무자비한 혹평에 자신만만 응수



<더 폴>이 이룩해낸 불가사의한 영상에 대한 언론의 화답은 가혹했다. 이미지에 비해 빈약한 스토리를 두고 <버라이어티>는 ‘속 빈 프로젝트’라 명명했다. 제니퍼 로페즈가 어린아이의 무의식으로 들어가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싱의 전작 <더 셀> 역시 기존의 스릴러영화와 달리 이미지의 향연에 불과하다는 혹평을 피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싱이 말한 것처럼 그건 어디까지나 <더 폴>이라는 감독 자신의 꿈의 프로젝트 이전에 만들 ‘400만달러짜리 팝콘무비’에 불과했다. 불과 몇년 전 언론의 혹평에 대해 싱은 “헛, 제니퍼 로페즈가 정신과 의사를 연기하는 걸 보려고 돈을 냈다면 당신을 위한 여행을 준비해드리죠”라고 자신만만하게 응수했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라면 언제든 수다쟁이가 될 준비가 돼 있는 싱이 감당할 수 있는 비난의 범위는 어쩌면 <더 셀>까지일지 모른다. <더 폴>은 지금까지 싱이 다른 영화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 코르크 마개였다. 자신조차 그렇게 오래 지속될지 몰랐던 4년 반 동안의 촬영 기간, 싱은 악전고투를 완수해낸다. 그러나 분명한 건 10년 혹은 15년이 걸렸더라도 싱은 이 일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를 “전세계를 통틀어 아무도 이런 시험적인 영화를 만들 만큼 돌지 못할 것이다”라고 평가하는 감독. 그는 “앞으로도 난 대중적이지 않을 것이고 머슴처럼 할리우드가 원하는 영화를 찍지는 않을 것이다”라며 자신의 영화의 당위성을 주장할 줄 아는 감독이다.

“널 호적에서 파버리마”



아버지와 의절하고 동생의 지원 받으며 영화 공부했던 타셈 싱

“마치 <금발의 미녀와 자는 법 101>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미국 유학 도중, 영화 서적 <Guide To Film Schools In America>를 발견한 사춘기의 타셈 싱은 그 길로 영화와 사랑에 빠졌다. 하버드에 가서 경제학을 전공하길 원했던 아버지의 바람을 등지고 싱은 영화학도가 된다. 아버지가 항공사 직원이라 무료 지급되던 비행기표 대신 배표로 가라는 게 시작이었다. 영화를 보려고 거짓말을 일삼는 아들을 보다 못한 아버지는 결국 싱을 없는 자식으로 여겼고 재정적 지원 역시 끊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턱도 없이 부족했다. 뒤늦게 타셈 싱을 따라 미국으로 유학 온 동생은 싱의 뜻을 이해해줬고, 수위일을 하면서 그의 작업을 위한 재정적 지원자 역할을 자처했다(이후 싱이 학비를 대줬고, 동생은 변호사이자 싱의 제작자가 된다). 10센트짜리 뜨거운 물에 27센트짜리 티백이 아까워 따로 집에서 차를 싸가지고 다닐 정도로 빠듯한 생활, 영화에만 미친 인도계 싱에게 친구는 없었다. 그러던 중 같은 학교 학생인 래리 퐁(<300> <왓치맨>의 촬영감독)과 지금은 <300>의 감독으로 유명해진 잭 스나이더를 만나 학창 시절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면서 본격적인 연출가의 길에 접어든다. 싱이 처음 두각을 나타낸 것은 REM의 뮤직비디오 <Losing My Religion>. 인도의 색감을 활용한 강렬하고도 초현실적인 영상은 화제를 모으며 영상의 마술사 타셈 싱을 각인시켰다. 이후 스미노프, 코카콜라, 나이키, 리바이스 등을 통해 선보인 독특한 영상으로 싱은 일류 CF감독으로 자리를 굳혔다. 영화 데뷔작은 <더 셀>(2008). 지금은 <300>의 제작진과 함께 만드는 액션 대작 <워 오브 더 갓>(2010)을 촬영 중이다.

(글) 이화정 zzaall@cine21.com

by 민지 | 2008/12/28 01:47 | 영화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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